일상/독서노트

[*****]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 구범진[역사]

치악산디에고 2019. 7. 15.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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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미세사

음력 1636년 12월(그레고리력 1637년 1월)의 상황을

조선, 청나라 등의 사료를 자세히 살펴

날짜별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다.


과연 청나라 군대는 몇 명이었으며,

조선군은 몇명, 강화도를 지키던 수비대는 몇 명이고 등등등...


1) 1936년 4월 홍타이지는 청태종으로 등극했는데 조선사신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삐졌다.2나) 1936년 여름~가을 청군대는 명나라 변방을 약탈 전쟁하여 명나라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정지작업을 하였다.

2) 1936냔 12월 한강이 얼기까지 기다려 조선을 침략하였다.

3) 서로군, 동로군으로 나눠서 침력하였고, 순차적으로 부대를 나눠서 침략하였다.

4) 중간에 전투를 피하고 최대한 빨리 서울에 도착하여 도성에 조선왕을 가두는 것이 작전이었다.

5) 반면 조선은 정묘호란의 경험을 살려 주요 지방도시에서 싸우지 않고 지방의 성읍을 버리고 산성으로 모두 산성에 모여 항정할 작전을 세웠다.

정묘호랑 때는 성읍에서 전투를 했다가 대패하고 약탈까지 당했다.

6) 청나라는 출발할 때 15일치 식량을 준비하였고, 중간에 식량이 떨어졌을 때만 약탈을 위한 전투를 하고 서울까지 직행하였다.

7) 겨울에 전쟁을 한 또하나의 이유는 가을 추수후 비축한 식량을 약탈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사실 서울 도성에 조선정부가 비축했던 식량을 그대로 군령미로 이용하였다.

8) 한양 북부의 산성에 주둔했던 군대는 순차적으로 두 방향에서 내려오는 청나라 군대 때문에 추격 전투를 하는데 혼란을 겪었고,
한양 이남의 근왕병들은 청나라 기병과 전투력에서 뒤쳐저 연전연패를 하였다.
9) 정묘호란이후 조선에 귀화했던 여진족들이 청나라의 정보원으로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강화도 침공 때 많은 정보제공 및 지원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10) 1937년 1월 16일 이후 갑자기 청나라는 전략을 바꿔 남한산성에 항복을 권하는 강화제의를 시작하였다. 조건은 왕이 나와서 항복하고 척화파 3명을 함께 보내라는 것.

11) 남한산성 포위에 주력하던 청군은 1월 22일 손쉽게 강화도를 함락하였다. 작은 배들을 육지를 통해 이동하여 수로를 건넜으며
조선의 판옥선은 홍이포의 견제와 조류의 바뀜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 강화도에서는 1천명 정도의 조선군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사실상 100여명만 청군에 대항하다가 손쉽게 함락되었다.

12)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들은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을 나와서 삼전도에서 항복의 의식을 치른다.

13) 삼전도 항복의 의식은 홍타이지의 황제즉위식과 비슷한 형식으로 치뤄져 결국 칭제의 완성으로 여겨진다.
14) 삼전도 의식 후 홍타이지는 바로 심양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마마(천연두)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주는 천연두가 만연하지 않아서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는 생신과 어릴 때 천연두를 앓은 숙신으로 나눠지는데
청의 황족 중 주로 침략전쟁이나 강화에 나서는 역할은 숙신들이 맡는다. 
15) 홍타이지는 생신이었고, 1937년 1월 16일 청나라 진영에서 마마 환자가 발생하면서 청나라의 마지막 전력이 변경된 것으로 여겨진다.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다.
지금까지 병자호란에 대한 시각과 많은 차이가 난다.

우리가 세니까 가자! 이런 전쟁들이 아니었다.


뭉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