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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행성(해외)/2018-히로시마

[일본][사진][2018-0115-월][2][하기] 쇼인신사->이등방문 집

하기...

저멀리 보이는 구릉선 산 아래가 하기성터 자리다.

먼저 남쪽에 있는 하기역에 들렸다가 시내 중심가 버스센터 그리고 북동쪽에 있는 동하기역이 보초버스의 종착지다.






신야마구치역에서 편도요금 2060엔.

코난패스 3일 1200엔에 구입하면

무제한 탑승이 가능하다.

물론 JR패스있으면 JR버스로 무료로 올 수도 있다.






하기버스센터->신야마구치역 슈퍼하기호 시각표

공동운항인데 JR버스만 해당되는 건지

모든 슈퍼하기버스를 JR버스로 이용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다.

코난패스와 JR패스 모두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상관이 없지만...





10시 하기버스센터 도착

10시 8분 서행버스(오렌지색)를 탔어야 하는데

10시 17분 동행버스 탑승

서행버스=>하기성터(12분소요)

구경후 도보로 조카마치-박물관 등을 거쳐 메이린학사까지 온 후 하기정식으로 점심식사 권함.






서행이든지 동행이든지 버스 색깔은 같다.

앞에 동, 서 표지를 잘봐야 한다.

1회 승차에 100엔.

배가 고팠지만 점심을 무려 2만5천원짜리 먹을 예정이므로 굶는다.









노선버스라 노인들이 엄청나게 탄다.







동역도착.

다음다음 정차가 쇼인신사다.

버스타고오면 종점이 이곳

버스센터에 내리지 말고 여기서 내려 동행버스타도 된다.

추후 일정은 쇼인신사에서 버스타고 문화센터 앞에서 하차

메이린 학사 구경후 다시 메이린 학사에서 서행버스 탑승

하기성터에서 하차 후 성터구경 후 조카마치를 걸어서 메이린 학사까지 와서

슈퍼하기호 타고 신야마구치로 돌아오면 된다.


서너명의 여행객들이 여기서 동행버스를 탔다.

나와 함께 보초버스로 온 사람들은 아니었다.






쇼인신사와 앞 버스 시각표

플러스 마이너스 5분은 생각해야 한다.

다시 출발할 때 버스가 5분 정도 일찍왔다.













쇼인신사->이등방문구택->요시다쇼인 탄생지로 계획을 잡았으나

배가 고파서 이등방문구택에서 돌아왔다.

요시다쇼인 탄생지 사진보면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하기 시내 사진이 너무 멋졌다.






여긴 입장료내고 들어가야 해서 패스







오른쪽이 이등방문






쇼인신사 안에 쇼카손주쿠가 있다.

쇼카손주쿠(일본어: 松下村塾しょうかそんじゅく)는 조슈 번사인 다마키 분노신이 나가토 국 하기 성에 개설한 사설학당으로 원래 야마가(山鹿) 식 병법[1]을 가르치던 시골 서당(私塾)이었다. 설립자의 조카 요시다 쇼인이 재인수해 존왕양이, 즉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외세를 막아내자는 사상을 퍼뜨렸다. 기도 다카요시이토 히로부미다카스기 신사쿠 등 이른바 조슈 번 유신 지사들이 모두 그의 제자로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유신의 요람이 됐다.

1860년 서양 문물을 직접 보려 밀항을 시도하다 발각당한 요시다 쇼인이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하는 안세이 대옥에 처형당하며 1차로 폐쇄당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부활했다가 1876년 순국군 내란이 일어나는 하기의 난 시기에 동문들이 휘말려 다시 폐교되었다. 1880년 요시다 쇼인의 친형 스기 민지가 재건했지만 1890년에 공표된 일황의 교육칙어로 완전 폐교됐다. 1922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현재 쇼카손주쿠 유적에는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라는 입석이 서있다(위키피디아) 










현판이나 구조가 

살짝 도산서원을 연상시켰다.

방에서 옆으로 마루를 길게 내어 놓은 형태

다만 크기가 도산서원버다 조금 더 크다.






일본도 포켓몬고가 난리인가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살짝 방한을 했다.








대학합격을 기원하는 소원들...

우리나라도 팔공산에 가는 것보다

도산서원이나 소수서원에 가서 기운을 받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작은 사당.

위패나 조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이등방문구택 200미터

요시다쇼인 탄생지 900미터(바로 옆에 사내 버스 정류장이 있다)






상록수림으로 담장









춥지 않은 곳











이토히로부미 구택의

이토히로부미 동상














젊을 때 사진은

살짝 유해진 느낌이 난다.


이완용 평전 읽을 때

평소에 이완용과 이토히로부미는 영어로 대화를 했다는 것이 기억나는데

이완용은 주미 초대 영사였고, 이등박문은 영국 유학의 경험이 있고...










사무라이 시절









입장료(기부금) 100엔

사진전 및 사진첩을 볼 수 있다.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우리는 잘 모른다.

위키피디아 자료(이토히로부미)라도 한 번 정독해 보기를 권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고종은 1851년생 이토히로부미는 1941년 생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문화어: 이또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번사)이자 일본 제국의 헌법학자정치가이다.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며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명은 리스케(利助)로,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나 ‘소로카쿠슌준’(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한국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로,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 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 6월 14일 통감직을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1] 에게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위키피디아)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2]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準士雇)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3](井上勝) 등 이른바 장주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 되었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인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Ernest Mason Satow)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討幕) 정책을 수행하였다.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몇 명의 방문객들이 있었는데 신발을 정말 반듯하게 벗어 놓았다.

나갈 때 신을 수 있는 방향으로....






요시다쇼인 탄생지 가는 길안내판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버스타고 메이린학사로 향함.

무엇보다 배가 많이 고팠다.






잠시 정차한 버스에서 찍어본

하기 시내